캄포 데 피오리(Campo de' Fiori)

캄포는 마당, 밭 같은 ~장(場)을, 피오리는 꽃이라는 뜻이라 결국 캄포 데 피오리는 ‘꽃밭’이라는 뜻입니다만 이곳에 와서 보면 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금치나 양배추 같은 채소들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꽃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 지역이 로마 시내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동안 개발되지 않은 공터로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로마시대에도 별로 쓸 일 없이 비어있었던 이 땅은, 현재의 광장 뿐 아니라 이 일대 전부가 대전차경기장Circus Maximus에서 경기할 전차팀들factiones의 준비 장소 중 하나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경기를 앞두고 F1팀들의 본부 시설이 들어오는 자리로 차고가 되는 막사, 마구간이 들어서고 레이서에 해당하는 기수(騎手)와 어자(御者/馭者) 그리고 마부와 노예 기술자, 준마들이 북적대 그것만으로도 볼거리가 됐을 것입니다.

대략 남동쪽에서 본 모습


대략 북서쪽에서 본 모습


반면, 중세동안 이 지역은 남쪽에서 바티칸으로 가는 도정에 있으면서도 시내의 ‘꽃밭’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이곳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은 1400년대에 들어 교황들이 이곳에 있던 길을 새로 정비하고(후에 ‘순례자의 길’via del Pellegrino이라고 불림.) 도시화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입니다. 상하수도 시설과 같은 제반 시설을 갖추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1500년대에 와서는 시장이 서고 정치와 공무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며 법령이나 공공(公共) 선언이 낭독되는 등 로마시대의 포룸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는 도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광장의 이름에 맞는 것은 꽃가게 뿐


순례자의 길via del Pellegrino. 남쪽에서 바티칸으로 들어가는 동맥으로 이미 로마시대에 있었지만
중세동안 골목길로 줄어든 것을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새로 정비했다.


길이 시작하는 모퉁이에 보르자 가문(알렉산데르 6세)의 문장(황소와 줄무늬)


이 광장은 종종 ‘교황이 바티칸에서 라테란 대성당으로 행차하는 길’[via Papalis]에 포함되어 교황들이 자주 이곳에 나타났고 교황의 교서와 선언들을 포고(布告)하거나 그 포고문을 붙여놓았기 때문에, 특히 그것들이 이단과 반란 혹은 혁명에 대한 경우, 왕들과 외교관들 역시 빈번히 찾아올 수밖에 없어 정치, 외교 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1870년 ‘로마’가 ‘이탈리아’의 일부가 되자마자 에토레 페라리Ettore Ferrari가 만든 동상.
바티칸을 바라보고 있다.


좌대에는 “브루노에게, 그가 예견한 세기에, 화형의 불길이 타올랐던 여기 이 자리에”
A Bruno il secolo da lui divinato qui dove il rogo arse라고 써 있음.


동시에 이곳에서는 1798년까지 남아있던 교수대가 알려주듯이 (고문이 따르는) 공적인 심문이나 처벌의 집행이 이루어졌습니다. 비록 그런 집행이 자주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유명한 사건은 수도사이자 철학자였던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의 화형입니다. 그는 1600년, 자신의 현대적이고 유물론적인 사상 때문에 화형 당했는데 이탈리아 통일 직후 반교회의 상징으로써 그가 화형당한 광장 한가운데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 외에는 무려 흑마법으로(!) 교황을 살해하려고 시도한 세 명의 수도사가 산채로 불태워진 일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동급으로 보입니다만...^^


이처럼 많은 사람이 찾아오던 이 광장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최근에까지 여관이나 선술집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나쁜 쪽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반노짜 카타네이Vannozza Catanei가 1513년에 연 ‘암소의 선술집’Taverna della Vacca(암소를 뜻하는 vacca는 ‘매춘부’라는 뜻도 있음)이었습니다. 하급귀족 출신의 그녀는 마찬가지로 나쁜 쪽으로 유명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의 정부(情婦)이자 (시오노 나나미 선생이 친애해 마지않는)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의 어머니입니다.

Taverna della Vacca. 지금도 건물만은 남아있다.


오랜 세월에 닿긴 했지만 그녀의 문장이 남아있다.


고급 창녀이며 세 남편의 상속자인 과부이자 뛰어난 사업적 감각을 가졌던 그녀는 유산의 상당부분을 부동산(예나 지금이나...-_-;;), 숙박업, 공공사업에 투자했습니다. 특히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에 시작한 “Vacca”-매춘업-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렇게 모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종교단체와 자선사업에 남겼습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미묘할 수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 지 궁금합니다.

이제 그런 가게는 찾을 수 없다.


그녀가 부동산 및 공공사업에 투자했다는 점, ‘순례자의 길’에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문장 아래에 있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의 문장(도로 정비에 참여했다는 의미?), 광장에 있던 선술집과 여관의 대부분이 그녀에게 속했었다는 이야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의 사업적 성공은 짜고 치는 고스톱권력의 비호 혹은 권력과의 유착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예전에는 이곳이 중요한 상업적 중심지 중 하나였던 만큼 이 주변은 수공업자들로 가득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을 찾아볼 수 없지만 광장을 둘러싼 길 이름-dei Balluari(가방), degli Staderari(저울), dei Cappellari(모자), dei Giubbonari(도포), dei Balestrari(활), dei Chiodaroli(못) 등-에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다만 ‘밧줄 길’via della Corda은 밧줄 장인들이 있던 곳이 아니라 이 광장에서 행했던 ‘밧줄 고문’tormento della corda 때문입니다.

여관, 선술집이 있던 자리를 차지한 바와 식당 등


오늘날 이곳은 예전과 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어디를 가나 관광객으로 가득한 로마 시내에서 비교적 이곳 사람들의 생활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이곳 역시 지나가는 관광객이 더 많기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로마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일을 제외한 아침나절에는 항상(1869년부터) 야채와 과일이 중심인 장이 서고 주일에는 각종 집회가 열리는 등 아직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전 여관과 선술집이 있던 자리에도 바, 식당 등이 들어서 밤에도 시끄러운 장소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아참나절에 열리는 시장. 점심때를 즈음해서 깨끗이 치워버린다.
그걸 매일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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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visRara | 2007/02/19 21:31 | 어쨌든 로마다-_-;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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