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에 관한 여덟 가지 미신(CRUSADE MYTHS)

글쓴이가 가톨릭 계열 대학에 소속되어있는 서양사람(미국인이겠죠?)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하겠지만 다시 생각해볼만한 것들을 보여줍니다. 3번이나 6번 등은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지만 4번이나 특히 2번이 사료(史料)를 통해 입증된다는 점(글쓴이의 주장에 따르면)은 지금껏 제가 가지고 있던 십자군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잘못된 근거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줍니다. 8번은 임진왜란에 대한 현재 우리의 인식이 일제 강점기의 경험에 비춰져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재미있습니다.

1번은 입장차이가 있는 것이라 당시의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관계를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말을 덧붙이기 곤란하지만 5번, 6번은,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교회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체계, 조직, 공동체가 사회적 의식, 문화의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동시에 그것을 이끌고 또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록 교회가 그 행위들을 권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막으려 했을 지라도 이 시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문화 요소로서 교회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시대적 한계라는 점은 남겨둬야 합니다.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 왜 석유를 사용해서 산업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냐고 물을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이 글에게 가장 인상 깊은 점은 8가지 항목들이 아니라 서두 부분인 현재의 십자군에 대한 이해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지난 세기의 반성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근거를 둔(보다는 이데올로기로 치장된 결핍의 해소를 위한) 폭력의 해악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십자군이라는 현상의 배경을, 그것도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유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십자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난/폭력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가 그렇게 교육받고 좁은 영역에서나마 재생산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반성하게 했습니다.

☞클릭☆★내용 읽기


십자군에 관한 여덟 가지 미신(CRUSADE MYTHS)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 사학과 교수

토마스 F. 메든

최근 십자군이 뉴스에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을 "십자군 전쟁"이라 잘못 칭했습니다. 그는 전세계 이슬람 신자들의 심기를 거스르고 상처를 주는 그러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가차없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 단어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라면, 진실로 아랍인들 자신이 그 단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고 있는가는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오사마 빈 라덴과 뮬라 오마르는 미국인을 "십자군"으로,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이라 불러 오곤 했습니다. 근 수십 년간 중동 아랍인들은 미국인을 "십자군"이나 "카우보이"같은 용어로 불러 왔습니다. 분명히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십자군은 서방 세계에서도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동방과 서방 사이에 상존하는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동-서방 문화의 사람들 대부분은 십자군에 대해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보입니다. 십자군은 일반적으로 서구 문명이, 특히 가톨릭 교회가 안고 있는 오점으로 흔히들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을 비난하려 혈안이 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체 없이 십자군과 종교재판을 이야기거리로 내어 놓을 것입니다. 십자군은 종교가 만들어낼 수 있는 악(惡)의 고전적인 실례(實例)로 자주 사용됩니다. 뉴욕이나 카이로를 불문하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평상적인 사람들을 인터뷰 한다면, 그들은 십자군이 평화롭고 번영하고 있는 세련된 이슬람 세계에 광신도들이 자행한 음흉하고 냉소적이며 정당성 없는 침략이었다는 같은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중세기 유럽인들 중에는 십자군이 최고 선한 행동임을 믿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이슬람 신도들조차 그들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의 신앙과 십자군의 이상을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더불어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미 교황의 권위와 대사(代赦)라는 그리스도 교리를 저버린 마르틴 루터에게 십자군은 권력에 굶주린 교황이 저지른 계략에 불과했습니다. 진정으로 루터는 이슬람과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슬러 싸우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투르크인들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신앙 결핍을 징벌하러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람들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술탄 슐레이만과 그의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기 시작했을 때, 루터는 싸워야 할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십자군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다음 두 세기동안 사람들은 십자군을 신앙고백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도는 십자군을 악마처럼 생각한 반면, 가톨릭 신자들은 십자군을 칭송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슐레이만과 그 후계자들은 단지 몰아내면 속시원할 사람들일 따름이었습니다.

십자군에 대한 오늘날과 같은 시각이 탄생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였습니다. 볼테르 같은 계몽 철학자들(philosophes)은 중세 그리스도교가 타락한 미신이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군은 광신과 탐욕과 정욕을 따라 이동하는 야만인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후 십자군에 대한 계몽주의식 관점은 유행할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낭만주의 시기와 20세기 초에 십자군은 (종교적 의미에서는 아닐지라도) 숭고한 전쟁이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론은 또다시 십자군에 적대적(敵對的)으로 변했습니다. 히틀러, 뭇솔리니, 스탈린의 등장으로 역사가들은 이데올로기-그것이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되었건 차별하지 않고-전쟁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적대감은 스티븐 런시맨 경(Sir Steven Runciman)이 저술한 세 권 분량의 『십자군의 역사』A History of the Crusades (1951-54)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런시맨에게 십자군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도덕적 모순으로 점철된 종교적 편협함의 극치였습니다. 십자가를 수여받고 중동 지역으로 진군했던 중세인들을 비관적일 정도로 악하고 강도처럼 탐욕스럽거나 유치할 정도로 잘 속아 넘어가는 자들로 평가했던 것입니다. 수려한 문체로 쓰여진 이 책은 곧 표준 역사서가 되었습니다. 거의 독보적으로 런시맨은 오늘날 인기를 얻고 있는 십자군에 대한 견해를 정의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십자군은 촘촘히 탐침(探針)하는 방식으로 조사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성전(聖戰)에 대해 그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간 학계가 맺어온 열매가 대중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는 속도는 느리기만 했습니다. 이는 전문 용어로 역사를 기술(記述)함으로써 학계 밖의 사람들이 접근하기에 쉽지 못한 연구를 출판하곤 했던 전문 역사가들에 부분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군에 대한 런시맨의 견해를 차마 떨쳐 버리지 못했던 현대 엘리트들의 주저(躊躇)하는 태도에도 분명히 잘못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군에 대한 현대의 인기있는 책들-결국 대중의 인기를 얻기를 갈망하는 의도였겠지만-은 런시맨의 생각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막강 파이톤」Monty Python에 출연했던 테리 존스가 사회를 보고 BBC/A&E가 제작한 연속 다큐멘터리 「십자군」The Crusades (1995)과 같은 대중매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작품에 역사 전문가들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프로듀서는 저명한 십자군 전문 역사가(歷史家) 다수의 인터뷰를 끼워 넣었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역사가들이 런시맨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녹화된 인터뷰를 교묘히 편집해서 그 역사가들이 런시맨에 동의하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조나단 릴리-스미츠 교수는 격분하여 저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실제로 믿지 않는 내용을 기정 사실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위조해 버렸어요."

그렇다면 십자군에 관한 진짜 역사는 무엇일까요? 기대하고 계셨겠지만, 그것은 길고도 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난 이십 년간 그에 관해 상당히 밝혀내고 있는 좋은 역사서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십자군이 받고 있는 집중 포화(砲火)를 생각한다면, 우선 단순히 오늘날 풍미(風味)하고 있는 십자군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지목(指目)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제일 좋을 것입니다. 다음은 십자군에 관한 가장 흔한 미신들이며 이어 그것이 왜 틀렸는지를 제시할 것입니다.

미신1: 십자군은 평화로운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선제 공격이었다.

이는 더할 나위없이 틀린 견해입니다. 모하메드 시대부터 이슬람은 그리스도 세계 정복을 추진했습니다. 그들은 그 계획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이루어진 정벌에서 이슬람 군대는 북 아프리카 전역과 중동, 소아시아, 스페인 대부분 지역을 정복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11세기 말까지 이슬람 세력은 그리스도 세계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향 팔레스티나, 그리스도교 수도원 생활의 시발지(始發地)인 이집트, 성 바오로 사도가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씨앗을 심었던 소아시아: 이곳들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변부가 아니라 핵심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슬람 제국은 정복 전쟁을 아직 끝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향하여 서쪽으로 압박해 들어왔으며 결국 그 도시를 지나 유럽 자체로 진입할 것이었습니다. 선제 공격은 전적으로 이슬람 진영에서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세계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자신을 방어하든지 아니면 단순히 이슬람 정벌군(征伐軍)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1095년 우르바노 2세가 소집한 첫 번째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황제의 긴급한 도움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우르바노 교황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기사(騎士)들에게 동방의 형제들을 도와달라 호소했습니다. 그것은 동방 그리스도교인들을 이슬람의 정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자비의 사명이 될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십자군은 방어를 위한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동방에 파견되었던 십자군 전체 역사는 이슬람의 공격에 대한 대응의 일환입니다.

미신2: 십자군은 십자가를 지니고 다녔으나 실제로 전리품과 점령지를 노획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신앙은 단지 강탈과 탐욕을 은폐하기 위한 상투적인 것이었다.

기사도(騎士道) 전투 훈련을 받았음에도 아무런 봉건 영지를 상속받지 못한 "서자"(庶子) 출신 귀족들이 유럽 인구 증가로 인해 과포화 상태가 되는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역사가들은 믿어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호전적(好戰的)인 남성들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고 상속지를 양도받을 소지가 있었으므로, 십자군은 그들을 유럽으로부터 멀리 떠나 보낼 수 있는 명분(名分)을 제공하는 안전 밸브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컴퓨터 데이터 베이스를 도입하여 연구에 이용하고 있는 현대 학계는 그러한 미신을 논파(論破)해 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1095년에 교황의 호소에 응답했고 추후(追後)에 조직되었던 십자군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유럽의 "적자"(嫡子) 출신들이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십자군 전쟁은 막대한 희생을 요구한 작전이었습니다.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매각하거나 저당(抵當)잡힘으로써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멀리 해외에 있는 왕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의 군인과 마찬가지로 중세 십자군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데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길 고대(苦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 상당 부분을 탈환한 제 1차 십자군의 극적인 승전 이후 실제로 모든 십자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주 소수만 잔류하여 새로이 차지한 지역을 정리하고 다스렸습니다. 약탈 역시 드문 일이었습니다. 사실 십자군이 의심의 여지없이 부유한 동방 도시들에 있을 엄청난 부(富)를 꿈꾸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무도 그 대가에 대한 아무런 변상도 받지 않았습니다. 돈과 땅은 그들이 십자군으로서 그곳에 간 본래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타국에서 좋은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구원을 얻으러 갔던 것입니다.

미신 3: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길거리에 피가 발목까지 차오를 때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량학살 하였다.

이것은 십자군의 악한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최근 죠지타운 대학에서 있었던 연설에서 (이때 클린턴은 보다 극적인 효과를 내려고 피가 무릎까지 차올랐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빌 클린턴은 미국이 이슬람 테러리즘의 희생자가 된 이유가 바로 십자군 때문이라 주장했습니다. 십자군이 도성을 점령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살해된 것은 분명히 진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전근대(前近代) 유럽과 아시아 문명에서 인정되는 도덕적 기준이란 포위에 저항하다 무너진 도시는 승자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건물과 재산 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로 예속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도시나 요새가 포위군(包圍軍)에 대항해 버티어낼 힘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저울질해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양도(讓渡) 협약을 맺는 쪽이 현명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경우 도성을 방어하던 사람들이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로부터 구원군이 올 때까지 예루살렘의 튼튼한 성벽이 해안가에 진치고 있던 십자군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줄 거라 계산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전략은 어긋났습니다. 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그곳은 강탈의 위험에 처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자유의 몸이 되거나 몸값을 치루고 석방되었습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것은 잔인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 기사가 지금 살아 있다면 하루 이틀동안 칼에 맞아 죽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무고한 남녀노소가 폭격으로 살해당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지적할 것입니다.

십자군에 항복했던 이슬람 도시들의 시민은 간섭받지 않았으며 그들의 재산을 그대로 보유할 수 있었고 자유로이 신앙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史實)은 주목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어느 역사가도 길에서 피가 발목까지 흘러 넘쳤다는 이야기를 관습적인 문학적 표현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무척 큰 도시입니다. 3인치 깊이로 피가 계속해서 흘러 넘치고 길거리를 가득 채우는데 필요한 피의 양은 그 도성 인구에 주변 지역 인구를 합한다 하더라도 결코 충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신4: 십자군은 단지 종교적인 수사(修辭)를 붙인 중세 식민주의에 불과하다.

중세 서구세계는 낙후되거나 진보가 느린 지역에 대한 모험적인 도발(挑發)을 감행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강력하고 주도적(主導的)인 문화가 아니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방의 이슬람은 강력하고 부유하며 수려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럽은 제3세계였습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창건된 십자군 국가(the Crusader States)는 이슬람 세계에 새로이 건설된 가톨릭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국의 미국 식민화 기도(企圖)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군 국가에서 가톨릭 인구는 언제나 적은 수였고 10% 이하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이탈리아 상인과 기사단, 그리고 통치자와 행정 담당관들이었습니다. 십자군 국가의 압도적 다수 인구는 이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이 인도(印度)에서 시행했던 플랜테이션이나 재외 상관(在外商館)의 맥락에서 생각해 보자면 그곳은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전초지(前哨地)에 불과했습니다. 십자군 국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팔레스타인의 성지, 특별히 예루살렘을 수호하고 그곳을 여행하는 그리스도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군 국가에게는 경제적 이해 관계를 가졌던 어떠한 모국(母國)도 없었으며 유럽인들도 그들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정반대로, 동방 라틴을 유지하기 위해 십자군에 들어가는 경비는 유럽 자원의 심각한 유출을 초래했습니다. 전초지로서 십자군 국가는 군사적인 면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이슬람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동안 십자군 국가는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슬람 세계가 단결하게 되자 그들은 요새를 부수고 도시를 함락시켜 결국 1291년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미신 5: 십자군에게 유태인들은 공격의 표적이었다.

어떠한 교황도 십자군에게 유태인들을 적대시(敵對視)하라 명하지 않았습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기간 중, 정예 군대와 관련 없는 천민 집단이 대거 라인란트의 도시들도 내려와 그곳에 있는 유태인들을 강탈하고 죽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탐욕이 부분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편 그것은 유태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민족으로서 전쟁의 적법한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으로부터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우르바노 2세와 후대 교황들은 유태인에 대한 공격을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지역 주교들과 성직자, 평신도들도 유태인을 보호하려 노력했지만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2차 십자군 전쟁 초기에도 일단의 배교자(背敎者)들이 독일에 있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의 학살은 성(聖) 베르나르도가 그들을 뒤쫓아 가서 중지시킬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이러한 빗나간 행동들은 십자군 운동에 대한 열정의 불행한 부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군 운동의 목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현대적인 유비(類比)를 적용해 보자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부 미국 병사들이 해외에서 범죄를 저질렀던 경우를 예로 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체포되어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의 본래 목적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신6: 십자군은 어린이 십자군을 조직할 정도로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했다.

1212년의 소위 "어린이 십자군"은 십자군도 어린이 군대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10대들로 구성된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을 십자군이라 선언한 후 해안까지 행진했던 행사였습니다. 그것은 독일에서 대중적으로 일어난 종교적 열정의 분출이었습니다. 도정(道程)에서 그들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고 심지어 산적이나 노상강도, 거지들마저 그들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해산(解散)하였고 결국 지중해가 그들을 가로막아 서자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들을 가리켜 "십자군"이라 칭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교황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집에 머물러 기도와 단식과 구호활동으로써 그를 도우라 거듭 촉구했습니다. 이 경우 교황은 먼 거리를 행진해 온 젊은이들의 열정을 칭찬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라 명했습니다.

미신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십자군에 대해 사과했다.

이는 뜻밖의 미신으로 보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를 거슬러 해악을 끼쳐온 모든 행위에 대해 용서를 청했을 당시, 교황은 십자군에 대해서 아무런 사과 언급도 없었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요한 바오로 2세가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데 대해 그리스인들에게 사과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역시 비슷한 유감(遺憾)을 표명했습니다. 그러한 약탈 사건 역시 인노첸시오 교황이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방지해 보고자 했던 비극적인 사고였습니다.

미신8: 십자군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슬람은 서방세계를 미워할만한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슬람 세계는 십자군과 더불어 서방세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부정확하게 연관지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못 됩니다. 이슬람은 서구세계가 의지하고 있는 잘못된 역사기술로부터 십자군에 대한 정보를 얻습니다. 이슬람 세계는 그들이 굉장한 승전(勝戰)을 거둔 대상으로서 십자군을 기념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서구의 저술가들은 현대 제국주의 인습(因襲)을 두고 고민한 나머지 십자군 전쟁을 선제 침략 약탈 전쟁으로, 그리고 이슬람을 묵묵이 고통받는 약자들로 개작(改作)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슬람 승전의 영광된 세기(世紀)의 역사를 폐기시켜 버렸고, 그 대신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慰勞)만을 전해 줄 뿐이었습니다.

-----------------------------------------------------------------------------------------
토마스 F. 메든(Thomas F. Madden)은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예수회 설립) 사학과 교수입니다. 그는 『십자군의 약사(略史)』 A Concise History of the Crusades 의 저자이며 『제4차 십자군』 The Fourth Crusade의 공저자입니다


적당히 골라놓고 보니 하필 성전기사단이네요.


첨언. 이 글에 학술적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본문에 대한 근거제시도 각주도 참고서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글쓴이의 경력만이 권위의 근거인데 글의 성격상(기고문이나 강연으로 보이는데) 한계인 것 같습니다. 근거나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은 아래 소개돼있는 글쓴이의 책이나 관련 서적을 찾아봐야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고 근거가 없다는 식으로 토를 다는 건 글의 성격을 착각한 것이겠지요.
시대적 한계라는 게 의외로 상당합니다. 미래에 인간의 윤리의식이 크게 성장하고 소유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을 때(올지 모르겠지만 :-P), 예를 들어 현대의 법체계를 보면서 무자비하고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야만적이고 모순에 가득 차 있다고 평한다면 억울······할까요?^^;

출처 : 십자군에 관한 여덟 가지 미신(by 聖母의 記士)

by AvisRara | 2006/02/16 23:09 | 옛날 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AvisRara.egloos.com/tb/220841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야채 at 2007/11/04 14:32
이 글은 학술적 가치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통념보다 오히려 더 부정확한 것을 '사실'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에 반대되는 내용을 제시하면서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것도 분명한 문제입니다. 이를 단지 '학술적 성격의 글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옹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의 성격은 사실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는 뻔뻔스러운 선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요.

첫째, 십자군의 주장과는 달리 예루살렘 순례자들은 전혀 박해받고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 동로마 제국 측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현지에서 그리스도 교도들과 접촉한 십자군은 당연히 실제 상황을 모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을 해산하고 돌아가자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박해를 막는다는 '좋은 일'이 목적이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성립하지 않습니다.

둘째, 약탈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흔해 빠진 일이었지요. 더구나 그 대상이 이슬람 교도로 국한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4차 십자군은 아예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서 점령하고 대량의 보물을 빼앗아 왔습니다. 1차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들도 '한 몫' 단단히 챙기고 돌아갔다는 점도 지적해야겠군요. 애당초 예루살렘에 대한 십자군을 제창할 당시부터 이미 '종교에 대한 박해' 뿐만 아니라 '동방의 보물'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애당초 약탈이 없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십자군은 대체 식량을 어디에서 보급받았을까요? 당시의 사회적 역량으로는 서유럽에서 바다를 통해서 보급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약탈을 해서는 안된다는 개념이 있었다면, 우선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지부터를 재고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십자군의 약탈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특히 샤티용의 레지날드 같은 자는 아라비아 대상들을 직접 습격해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이는 특이한 사례도 아닌 것이, 살라딘과 예루살렘 왕국의 조약에서도 대상을 공격하지 말라는 조항이 나옵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언급되었죠.) 게다가 이 자는 더 심한 짓도 저질렀는데, 이슬람의 성물을 약탈하기 위해 메카와 메디나를 습격했던 것입니다. 급히 달려온 살라딘의 군대에 의해 불과 10km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저지당했습니다만, 십자군의 약탈은 그 정도였습니다.
또다른 사례는 트리폴리의 레몽인데, 예루살렘이 점령된 후 피난온 사람들의 재물, 그러니까 그 곳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기록자의 표현을 빌리면 '이슬람 교도들도 손대지 않았던 바로 그 재물'을 빼앗아 갔습니다. 레몽이 부상 때문에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속죄나 구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셋째, 십자군은 결코 '방어적'인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이슬람 세력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세를 취하기는커녕 십자군의 공격에 대해 방어전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습니다. 만약 1차 십자군이 이슬람 세력이 공세를 취할 수 있었던,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건재하던 시점에 도착했다면, 해안에서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무엇을 지키는 방어란 말입니까? 프랑스나 독일, 영국은 어차피 위협을 받는 대상이 아니었고, 동로마 제국을 방어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4차 십자군으로 대표되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감과 약탈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이 동로마 제국에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넷째, 어린이 십자군은 결코 이탈리아 끝에서 멈춰서지 않았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그대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_-a 오히려 이슬람 지도자들이 이들을 동정해서 이들 중 많은 숫자를 자기 돈으로 사서 해방시켜 줍니다.

다섯째, 이슬람 교도들이 십자군을 승전의 대상으로 기억하는 것과 원한의 대상으로 기억하는 것은 얼마든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어떻게 기억합니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자세한 내용을 직접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 역사책에서 얻은 지식에 의존하죠. 하지만 임진년에, 그리고 병자년에 침략을 당했다는 '원한'은 충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수많은 자랑스러운 '승전'울 기억하고 있지만, 그건 그거고 침략당한 원한은 원한이죠.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성과 없이도 충분히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섯째, '중세 식민주의'는 맞습니다. 물론 근대의 제국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민주의가 아닌 것은 아니죠. 이미 먼급한 바와 같이 이들은 예루살렘 순례자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땅을 점령'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봉건제 하에서 아버지의 봉토를 상속받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십자군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것을 생각하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리고 이 논리는 처음부터 무리가 있는 것이, 당시 십자군에 참가한 사람들이, 이슬람 교도들이 다시 정치적 구심점을 얻게 되고 나면 자기들이 열세에 몰릴 것이라는 점까지 예상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수세에 몰린다고 해서, 실제 역사에서처럼 반드시 자기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완전히 축출될 것이라고까지 예상했을까요? 하틴의 뿔 전투 진행과정을 보면, 사막에서 무리하게 진군하다가는 물 부족에 시달릴 것이라는 것조차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인데요?

그리고 시대적 한계라는 말씀도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십자군 전쟁에서 서유럽인의 행동이 그렇게도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상대한 이슬람 교도들이나 동로마 제국인들과도 선명하게 대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피가 발목까지 차올랐다는 것은 물론 문학적인 표현이지만, 대학살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이슬람 교도의 기록 이전에 일차적으로 당시 그곳에 있었던 서유럽인들이 '자랑스럽게' 기록에 남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예루살렘이 살라딘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을 때, 살라딘은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십자군의 대학살에 대한 원한이 생생하게 살아있던 상황에조차 그랬습니다. 이슬람 교도들이 믿음의 힘으로 시대를 초월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십자군의 행동을 '시대적 한계'라고 옹호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십자군의 약탈과 학살 같은 것은 유럽 내부의 다른 전쟁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에스파니아에서 그라나다를 함락시키는 과정에 참여한 프랑스 기사들이 약탈을 금지당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아예 프랑스로 돌아가 버린 사례도 있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이단'과의 전쟁에서도 어김없이 대학살이 있었고 말이지요.
이렇게 보면 예루살렘에서의 약탈과 학살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적이었던 이슬람 교도들이 너무나 대조적인 행동을 했다는 점이었지요. 이것도 시대적 한계라면 한계겠지만, 단순히 '시대적 한계'라고 부르기보다는 그 시대의 '그리스도 교도들'의 한계였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슬람 교도들이 북아프리카나 스페인 등을 점령했을 때에도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교도들과 같은 학살은 없었습니다. 이슬람 교도들이 실제로 '이교도'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된 것은 십자군 전쟁 진행과정에서였습니다. 살라딘 당시까지만 해도 이슬람 교도들은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바이바르스 대에는 더이상 관용은 없었지요. 이것이 우연의 결과일까요? 십자군 전쟁이 진행되는 시점이 '우연하게도' 이슬람 교도들이 관용을 잃고 증오심을 갖게 되는 시기와 겹친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십자군에 참여한 유럽인들의 탐욕과 잔인함, 그리고 바보스러움은 동로마 제국의 기록에서도 언급되는 바이며, 실제 역사적 사실들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걸 전부 미신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아무런 근거조차 제시하지 않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글에 동의할 수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군요. 글쓴이가 교수라는 권위는 별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백인이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다는 주장도 충분히 생물학 교수의 명함을 달고 나왔습니다. 이 글은 딱 그 수준입니다.
Commented by AvisRara at 2008/04/20 19:11
조만간 관련글을 쓸 생각입니다.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